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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생 경열씨의 ‘대리운전 이야기’
73년생 경열씨의 ‘대리운전 이야기’
  • 편경열
  • 승인 2018.03.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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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생 경열씨
73년생 경열씨

저녁 8시부터 십분에 한번씩 하품을 해가며 새벽 두시가 다 되어 마지막 진상 손님을 내려주고 집에 들어왔다. 15분이면 끝났을 마지막 손님은 거의 한시간 동안 질질 끌고 다니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뒤에서 따라가는 나도 나지만, 손님 차를 운전했던 ㅈㅂ는 더 지쳤을 거다.

그런가하면, 보람동에서 부강면으로 픽업했던 '서병승'씨는 기억에 남는 손님이다. '서병승'은 사실 그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그에게 이름이 있다면 아마 '서.병.승.'이라는 이름처럼, 발음할 때 착하고 순박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그는 나에게 '병승'씨가 됐다.

그의 차는 H사에서 1990년대에 출시한 승합차 ㅅㅌㄹㅅ였다. 수동변속기를 장착한 그 차는 주행거리마저 20만 km가 훌쩍 넘긴 상태였다. 차때문에 우리의 얘기는 시작됐다. 병승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이런 승합차를 몰고 다니세요?"

그는 거의 말마다 한숨을 섞었다.

"후~! 애가 셋이구, 부모님까지 계셔서 오래전에 중고로 샀는디, 매장에서 나오자마자 차가 스드라구유. 직원한티 따졌더니 바로 미션인가 뭔가를 바꿔줬는디, 그때부터 지금까지 멀쩡허게 타고 다녔슈."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려고 승합차를 샀다면 그는 분명히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는가봐요?"

"후~! 예~~~얼마 전에 두분 다 돌아가셨슈."

그는 내게 자기가 몇번째 손님인지 물었고, 자기도 대리운전을 할까 생각 중이라면서, 20년 동안 다닌 공장이 비틀거린다고 말했다.

"후~! 옛날에는 넘어진다, 넘어진다 혀두 회사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었슈. 근디 요새는 넘어진다, 허믄 1~2년을 못가구 넘어져유."

직원도 몇 명 되지 않는 작은 공장인데, 아무래도 요새 불안하다고 했다. 맞벌이를 하느냐고 물으니 헛웃음과 함께 맞벌이 하지 않고 살 수 있느냐는 질문 아닌 질문이 돌아왔다.

"후~! 마누라가 힘들어하는 걸 아는디 그만두라는 말을 못하겄슈. 큰 애가 대학에 들어갔는디~허허!"

마지막에 그가 내뱉은 헛웃음은 웃음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첫째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기를 바랬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면 나는 병승씨의 딸이 무슨 대학에 무슨 '꽈'에 들어갔는지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내린 곳은 부강면 어디쯤 뻘쭘하게 솟아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창문을 보니 평수가 작은 아파트였다. 그 작은 아파트에 올해 대학에 들어간 병승씨의 첫째 딸과 또 대학에 들어갈, 아니, 그가 대학에 들여보내야 할 아이들이, 그리고 그런 아이들과 늙은 시부모님을 위해 맞벌이를 감내해 온 그의 아내가 살고 있다.

차에서 내려 요금을 받으며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그의 입은 헤벌쭉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을 생각하는데, 병승씨가 "거스름돈은 됐어유"라고 말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술에 취해 시덥지 않은 돈자랑을 내릴 때까지 늘어놓다가, 계산할 때는 그놈의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와서 천원짜리 한장까지 챙겨가는 손님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래서 나는 병승씨가 "거스름돈은 됐어유"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거스름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과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한 생각이 뒤엉켜 결국 "수고하세요"라는 엉성한 인사만하고 헤어졌다.

병승씨의 공장이 망하지 않고, 그가 은퇴할 때까지라도 남아있으면 좋겠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퇴근해서 다시 대리운전을 하기 위해 도시의 빌딩 사이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에 들어간 큰 딸이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고생한 지 아부지와 어머니에게 잘했으면 좋겠다. 병승씨의 아내가 건강했으면 좋겠고, 그의 차가 '소나 탄다'는 H사의 중형 승용차 정도로는 바뀌어 있으면 좋겠다. 둘째나 셋째가 바꿔주면 어떨까?

아, 참! 그리고...그리고...그때도 병승씨의 차를 대리운전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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